일주일간 만주에서 함께 지낸 2009 청산역사대장정의 벅참과 감동, 그리고 대원들과의 추억을 그냥 머리속에 두면 점점 사라질 것만 같은 아쉬운 마음...
대장정 참가 신청서에 참가 기록을 자료로 남겨 활용하겠다던 약속...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교원팀의 청산리역사대장정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페이지의 포스팅을 남겨봅니다.


박환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강의시간에 들었던 '만주지역한인유적답사기'속의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간다는 것. 여행이 아닌 항일독립투쟁을 펼쳤던 중국 만주일대의 유적지들을 찾아 볼 수 있다는 점들은 '2009 청산리 역사대장정'을 뿌듯함과 설레임속에 출발하기에 충분했다.

우리의 대장정 경로가 대략의 직선거리만 저정도이니 정말 대장정이다.


1일차(8월3일)

첫 날 일정을 위해 6시 30분까지 인천공항으로 모이라고 했다. 모임 장소 부근으로 가니 캐리어가 아닌 배낭을 매고 있는 등산복 차림을 한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모두 1주일간 대장정을 할 분들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 대장정에 필요한 물품을 지급 받고 복장을 갖추니 어느새 하나의 목적을 가진 대장정 팀이 되어 있었다. 
단장님과 부단장님의 인사말과 집행부의 안내에 따라 짐을 부친후 9시 40분에 대련을 향해 출발 했다. 내 옆자리에 앉으신 국사편찬위원회의 장선생님은 이륙장면을 카메라에 동영상으로 담고 계셨다. 

대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여순으로 향했다.

빠듯한 일정을 짐작케했다.



여순감옥 입구에서 단체사진 


안중근의사 순국 장소 앞에서 한상권 교수님으로 부터 설명을 듣고 안중근의사에게 참배를 드렸다.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도 많은 유묵을 남겼다. 

안중근 의사의 흉상이 모셔진 기념 건물안에는 유묵들이 전시되어 있다.


순국장소로 끌려가는 안의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벽에 붙여놓았는데 얼굴부분의 선명치 못한 부분을 어린아이 낙서 하듯이 대충 윤곽을 그린 모습을 보고 좀 더 성의있게 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이곳이 우리 땅이 아니라는 아쉬움과 함께 느껴진다.

참배를 마치고 단장님의 안내에 따라 감옥안 답사를 시작하였다.


사형장의 교수형대


당시 수감자들이 입었던 수형복


서대문형무소와 너무나 비슷한 모습의 여순감옥


감옥 내부 집기들


안중근의사 투옥 장소 앞에서 설명중이신 박환 단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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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의 감옥 내부 이동 경로


감옥에 수용되어 있던 이들을 탄압하던 도구들


감옥에 수용되어 있던 이들을 탄압하던 도구들

전시물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것은 형틀과 고문 도구들이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수감생활이었을지 짐작이 가능했다.


단재 신채호선생께서 투옥되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앞에서 대원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죄수들이 수용소내에서의 수공공장에서 강제노동에 활용되었던 도구들


안중근의사는 순국직후 북쪽 문(사진 우측)으로 수레에 실은채 내보내져 사진 왼쪽의 크레인이 위치한 부근 쪽에 임시로 묻혔다.
중국이 여순감옥 복원에 발맞춰 지난 개방하던 해인 1971년부터 86년까지 5차례에 걸쳐 감옥 공동묘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안중근 의사 묘지를 찾아보려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86년 7월에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까지 가세하여 중국과 함께 조사를 벌이기도 했지만 묘지를 찾아내는 데는 끝내 실패했다. 
우리나라 조사발굴단도 2008녀 3월 하순부터 2개월간 사진속의 아파트와 크레인주변을 조사했으나 실패했다.
“내가 죽은 뒤 내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이 유언은 동생들에게 한 유언이지만 지난 100년동안 우리모두에게 남긴 유언인 것만 같은 기분이든다.


많은 선열들이 희생 되었을 교형장

교수형이 마쳐지면 바로 나무통에 넣어 매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사형이후 나무통 안의 시신


교형자 대기실이 사형장 좌측에 두개가 있었으며 한사람이 들어가 서있을 정도의 크기 이다.


처형된 시신을 옮기는 다른 수용자들의 처참한 생활을 보여주는 디오라마


여순감옥은 미리 지어진 러시아식 회색 벽돌 건물과 일본이 확장하여 지은 빨간 벽돌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여순감옥 공식 홈페이지를 가면 북한식 말(조선어)로도 소개가 되어 있는데, 여순감옥을 '여순일러형무소'로 소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수감자를 소개한 '추구와 항쟁'페이지에는 '민족해방과 반파쇼투쟁의 걸출한 대표자'라는 표현으로 안중근의사와 신채호선생을 맨 아래 소개하고 있다.
여순감옥 공식 홈페이지 가기

여순 감옥 답사를 마치고 안중근 의사가 재판 받았던 여순 관동주법원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은 1906년 9월 1일 여순감옥과 동시에 설립되어 1906년부터 1935년까지 총 21376건의 판결을 내린 곳이다.


여순 관동주법원으로 들어가는 대원들

안중근의사가 판결을 받던 관동지방법원의 재판정 모습

안중근의사가 판결을 받은 재판정은 법원 중앙 건물 좌측 통로를 이용하여 올라갈 수 있었다. 재판정은 안의사 재판 당시 모습이라고 한다.


공판 당시의 안중근(우측)

 

법원을 나와 중국에서의 첫 식사를 위해 차에 올랐다.
낮선 중국의 여순 풍경은 창가에서도 셔터를 누르게 만들었다.


인근에 바다가 있어 해군이 주둔하고 있다.


13시 50분경, 첫 번째 중국 식당이라 기대(한국사람인데 그래도 입맛에 맞춰주겠지)와 두려움(향이 강하고 느끼해서 도저히 먹을 수 없음)으로 입구에 들어섰다. 생선비린내와 야릇한 향이 코를 찔렀다.

드디어 식사!
사진으로만 보면 먹음직 스럽다.

우리나라 중국집처럼 회전식 식탁이다.

작은 밥그릇과 젓가락이 식기의 전부다. 하나씩 먹어 보았지만 작심하고 넘기지 않으면 삼켜지질 않았다.


복숭아 장수가 100위안짜리를 받아 들고 위폐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엄청난 옥수수 밭은 계속 이어지고 피로감은 점점 밀려온다.


18시 20분, 대련에서 단동으로 가는 사이에 하나 밖에 없는 대고산 휴게소에 도착했다.

많은 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근심을 비웠고 버스기사는 차를 닦는데 여념이 없다.

화장실은 의외로 깨끗했으며 핸드 드라이기는 절전차원에서인지 작동이 되지 않았고, 우리나라 당구장에 많이 있는 롤타월이 걸려 있었다.


멜라닌 어쩌고 하며~ 박성완 비서가 나눠준 대륙의 제크(?)... 허기를 달랬다.


점점 해는 저물고...


20시 40분경에 드디어 단동의 호텔에 도착했다. 미리 조사한 바로는 3성급호텔이며 실내에 인터넷이 되는 PC가 배치된 곳이었으나... -_-;


호텔방을 배정받고 9시경 늦은 저녁식사를 할 수있었다.


 

배가 고팠을까? 비위가 맞춰지고 있는 것일까? 점심 때 보다는 식사를 좀 더 할 수 있었다.
이 때의 기분으로는 일주일간 살이 엄청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식사후 단장님이하 모든 대원들이 자기 소개를 하고 내일부터 일정에 대해 결의를 다지고 나서 11시가 넘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낮선 땅에서의 첫 숙박은 생각보다 괜찮았으며, 신기하게도 하루사이에 한국과는 너무나 다른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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