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친일반민족행위자

강화도 조약의 숨은 조력자, 1호 친일파 김인승

멘탈오브스틸 2025. 8. 9.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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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의 숨은 조력자, 친일파 김인승의 삶과 평가

1876, 조선의 문호를 강제로 연 강화도 조약. 이 불평등 조약의 뒤편에 일본 측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조선인, 김인승(金麟昇)이 있었습니다. '친일파 1'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와 함께 역사에 기록된 그의 삶을 알아보겠습니다.

 

강화도에 상륙하는 운요호

성장 배경과 친일의 시작

김인승의 정확한 생몰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함경북도 경흥 태생으로 지방 양반 가문, 즉 토반(土班)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경흥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며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가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러시아어와 한문에 능통했던 그의 언어적 재능 때문이었습니다. 1875, 연해주 지역을 탐색하던 일본 관리 세와키 히사토(사와키 히사토)와 그를 통역하던 다케후지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김인승의 학식과 경험을 높이 산 세와키는 그를 일본으로 데려갔고, 이는 훗날 강화도 조약에서 일본 측의 첩자로 활동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사학자 구양근 교수가 일본 외교 사료관에서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김인승은 일본 외무성과 정식으로 고용 계약까지 체결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5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이 계약서에는 고용 목적, 급료 등이 명시되어 있어 그의 친일 행적이 단순한 협조를 넘어선,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강화도조약 체결 장

 

강화도 조약에서의 적극적인 친일 행적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김인승은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군함에 머무르며 조약 체결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그는 조약문의 한문 번역과 수정을 도맡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 조정의 내부 사정과 관리들의 성향을 일본 측에 상세히 전달하는 첩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조선 대표단을 압박하기 위한 구체적인 협박 문구를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청나라도 일본과 먼저 조약을 맺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깊이 생각하라"와 같은 내용은 그의 단순한 통역을 넘어선 적극적인 개입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조선의 개항이 애국'이라는 그릇된 신념에 사로잡힌 그는 일본의 침략 야욕을 간과한 채 나라의 주권을 넘기는 데 일조하고 말았습니다.

 

최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일본으로 건너간 김인승은 일본인들로부터도 멸시와 위협을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일본을 떠나 러시아 연해주로 향했지만, 그의 친일 행적은 이미 널리 알려진 뒤였습니다.

구체적인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 단체에 의해 '민족의 반역자'로 처단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나라를 판 대가로 얻은 것은 결국 동포의 손에 의한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참고: 현대사에서 언급되는 친일 화가 김인승(金仁承, 1910~2001)은 동명이인으로, 강화도 조약의 김인승과는 다른 인물입니다. 화가 김인승과 그의 동생인 조각가 김경승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다수의 친일 작품을 남겼으며, 이들의 후손에 대한 기록은 일부 남아있어 혼동을 피해야 합니다.

 

현재의 역사적 평가

김인승(金麟昇)은 근대적 의미의 '친일파 제1' 로 평가받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항왜(降倭)가 있었지만, 국가 간의 조약이라는 공식적인 외교 무대에서 자국의 이익을 저버리고 적대국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첫 번째 인물로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5인 명단에 밀정 부문으로 포함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개인의 그릇된 신념과 판단이 국가와 민족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로 남아, 오늘날 우리에게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기억해야 하는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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