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친일반민족행위자

을미사변의 조선인 협력자, 우범선

멘탈오브스틸 2025. 8. 9.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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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 10 8일 새벽, 조선의 왕궁 경복궁에 일본 낭인들이 난입하여 국모(國母)인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한 을미사변. 이 비극적인 사건 뒤에는 일본의 만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조선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바로 조선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禹範善, 1857~1903)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친일파'라는 주홍글씨와 함께 우리 역사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범선

1. 우범선의 생애: 엘리트 무관에서 친일의 길로

 

성장 배경과 초기 활동

우범선은 1857년 충청북도 단양의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가문에서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군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1881, 조선의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의 참령(參領, 현재의 소령급)으로 임관하며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별기군(別技軍)이란?

1881년(고종 18년)에 창설된 조선 최초의 신식 군대입니다.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서양식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우수한 인재들이 선발되었습니다. 하지만 구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로 인해 임오군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초기 우범선은 김옥균 등이 이끄는 개화파에 속해 조선의 근대화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후 정치적 격변 속에서 흥선대원군파로 분류되어 평안북도로 유배를 다녀오는 등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습니다.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 을미사변 기사

을미사변 가담: 돌이킬 수 없는 선택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일본의 지원으로 창설된 훈련대의 제2대대장으로 임명된 우범선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오점을 남기게 됩니다. 당시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쳤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할 계획을 세웁니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이 계획에 조선인 협력자로 우범선을 끌어들입니다. 우범선은 자신이 이끌던 훈련대 병력을 동원하여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는 것을 돕고, 길을 안내하는 등 명성황후 시해 작전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심지어 시해된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워 증거를 인멸하라는 명령을 내린 인물로도 지목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군인이 왕비를 시해하는 데 앞장선, 용납할 수 없는 반역 행위였습니다.

 

일본 망명과 비참한 최후

을미사변 이후, 친일 내각이 수립되었지만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정세는 급변했습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우범선은 다른 친일파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란?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을 말합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의 보호를 받기 위해 단행했으며, 이로 인해 친일 내각은 붕괴하고 친러 세력이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그는 일본인 여성 사카이 나카(酒井 ナカ)와 결혼하여 아들 우장춘을 낳는 등 새로운 삶을 꾸리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암살의 위협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결국 1903년 11월 24일,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고영근(高永根)에게 암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고영근은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로,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우범선을 처단한 것입니다.

 

2. 아버지의 업보를 짊어진 아들, 우장춘 박사

우장춘

우범선의 아들은 바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 1898~1959) 박사입니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진짜 업적은 척박했던 한국 농업의 부흥을 이끈 것입니다.

아버지의 친일 행적은 우장춘 박사에게 평생의 멍에였습니다. "역적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는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고, 일본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으며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동경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한 뒤, 육종학 연구에 매진하여 세계적인 학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특히 종의 합성에 관한 그의 이론은 현대 유전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은 "우장춘 박사 귀국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그의 귀국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1950, 그는 마침내 조국 땅을 밟았고, 이후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며 벼, 감자, 배추 등 주요 작물의 품종 개량에 헌신했습니다. 굶주리던 우리 국민들의 배를 채우고 한국 농업의 과학화를 이끈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장춘 박사가 조국을 위해 헌신한 것을 두고, 아버지 우범선의 과오를 속죄하기 위함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는 나라를 팔았지만, 나는 내 지식과 기술을 조국에 바치겠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의 죄를 아들이 대신 갚으려 했던 그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3. 우범선에 대한 현재의 역사적 평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우범선은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습니다. 을미사변 당시 그의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매국 행위이며, 민족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는 단순히 시류에 휩쓸린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영달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선 인물입니다. 조선의 군인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국모를 시해하는 데 가담한 그의 행적은 두고두고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아들인 우장춘 박사가 대한민국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우범선의 이름이 대중에게 더 알려지게 된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위대한 업적이 아버지의 죄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장춘 박사의 헌신을 기리는 동시에, 그의 아버지 우범선이 저지른 과오를 잊지 말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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