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친일반민족행위자

독립운동가의 피눈물로 부를 쌓은 고문귀신, 하판락

멘탈오브스틸 2025. 8. 17.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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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을 배신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운동가들을 잔인하게 탄압하며 부와 권력을 누렸던 '친일파' 존재했다. 수많은 친일파 중에서도 '고문 기술자', '악질 경찰' 불리며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옥을 선사했던 인물, 언뜻 노덕술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는 민족반역자 하판락의 생애와 그의 추악한 친일 행적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평범한 청년에서 악명 높은 고문 경찰로

 

하판락은 1912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초기 생애는 특별할 없는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1934, 만주국 경찰이 되면서 180 달라지게 된다. 만주국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세운 괴뢰국가로, 이곳의 경찰이 된다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충실한 도구가 되겠다는 의미로 평가받는다.

만주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38 경상남도 경찰부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 탄압에 앞장서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가 배치된 '고등계(高等係)' 그의 악명을 떨치게 무대가 되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고등계 형사

'고등계'는 일제강점기 경찰 조직 내의 특별 부서로, 주로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 등 일본 제국의 통치에 저항하는 세력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합법, 불법을 가리지 않고 사찰, 체포, 고문을 자행했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하판락은 바로 이 고등계의 핵심 인물이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고등계 형사가 된 하판락은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데 혈안이 되었던 것으로 기록된다. 그의 이름은 특히 항일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 단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의열단장 김원봉을 향한 집착과 잔혹한 고문

 

하판락의 친일 행적에서 빼놓을 없는 인물은 바로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으로 평가받는다. 김원봉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고 끈질기게 쫓던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다. 하판락은 김원봉을 체포하는 광적으로 집착했으며, 그를 잡기 위해 수많은 의열단 단원과 관련자들을 체포해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자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고문은 매우 잔인하고 악랄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단순히 정보를 캐내기 위한 수준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히 파괴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물고문과 전기고문은 기본이었고,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거나 관절을 꺾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고문들을 자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에게 고문을 당했던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의 회고를 통해 그의 잔혹성은 상상을 초월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판락은 고문을 통해 수많은 독립운동 조직을 와해시켰고, 그의 '공로'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 표창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피와 눈물이 그의 출세 가도의 자양분이 되었던 것으로 있을 것이다.

서울로 압송 되는 하판락

해방 후의 , 단죄 받지 않은 친일파

 

1945 8 15, 꿈에 그리던 광복이 찾아왔다. 모든 독립운동가와 국민들은 친일파들이 응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던 것으로 기록된다.

해방 친일파 청산을 위해 설립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활동을 시작하며 하판락 또한 1949 체포되었다. 그의 악행을 기억하는 수많은 피해자들이 그의 처벌을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비호와 방해, 그리고 친일 경찰 세력의 조직적인 저항으로 반민특위는 결국 강제로 해체되고 만다.

반민특위 위원들

반민특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줄임말로, 1948년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설치된 특별기구로 정의된다. 일제강점기 동안 자행된 친일반민족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친일파를 자신들의 권력 기반으로 삼으려 했던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체된 것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결국 하판락은 풀려났고,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기는커녕, 일제강점기 시절 경찰로 일하며 쌓은 인맥과 정보를 이용해 사업가로 변신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것이다. 그는 부산 다대포에 광활한 땅을 소유하고 소금 공장, 운수업 등을 운영하며 지역 유지로 호의호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이 가난과 사회적 냉대 속에서 고통받는 동안, 정작 그들을 고문했던 하판락은 2004년, 92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며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이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역사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게 될 것이다.

하판락의 가족과 후손들

 

하판락이 친일 행위로 축적한 부는 고스란히 그의 후손들에게 상속되었을 것이다.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안락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하판락이 소유했던 부산 다대포의 땅은 시간이 흐르며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후손들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 없이, 상속받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법적 소송까지 벌이는 모습을 보여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이는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 그들의 부와 기득권이 어떻게 대물림되고 역사를 왜곡하는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단면으로 평가받는다.

 

역사적 평가와 우리가 기억해야

 

오늘날 하판락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경찰 부문에 등재된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단순히 일제에 부역한 수준을 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직접적으로 탄압하고 고문한 '적극적이고 악질적인' 친일파였던 것이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정의는 과연 살아있는가?', '역사 청산은 중요한가?'. 하판락처럼 단죄 받지 않은 친일파의 존재는 우리 현대사의 정의가 바로 서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뼈아픈 증거로 평가받는다.

우리가 하판락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악행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불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던 시대를 잊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만큼, 그들을 짓밟았던 하판락과 같은 인물들의 죄상 또한 명확히 기록하고 후대에 알려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올바른 역사 교육만이 2 하판락이 땅에 나타나는 것을 막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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