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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혜석에 대해서
    역사 2024. 1. 18.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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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나혜석과 가족


    1) 부친 나기정

    나기정(羅基貞, 1863년~1915년 12월 10일)은 대한제국과 조선총독부의 지방 관료이다. 본관은 나주이다.
    나씨 가문은 19세기 말부터 지방관을 역임하거나 재산을 축적한 가문으로 자리를 잡았고, 화성군 봉담면 수기리에 거주하였다. 수원 지역에서는 이 집안을 ‘나 부잣집’ 혹은 ‘나 참판 댁’이라고 불렀으며, 여기서 참판 댁은 증직(贈職)에 의한 호칭으로 보고 있다. 나기정은 나영완(羅永完)의 3남으로 형 기원(基元)과 기형(基亨)의 동생이다. 1900년 경기도 관찰부 주사를 지내는 등 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하다가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전인 1909년 시흥 군수로 임명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도 조선총독부 소속으로 자리를 옮겨 시흥 군수로 다시 발령받았고, 1912년부터는 2년간 용인군 군수를 지냈다. 1914년 행정 개편으로 지방 관료들이 상당수 사임할 때 나기정도 군수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나혜석에게 결혼을 강요했던 해인 1915년 12월 10에 사망하였다.
    나기정의 묘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에 있으며 묘비의 비문은 아들 나경석이 주도적으로 작성했다고 전해진다. 묘지 부근에 수원지역의 유지였으며 나혜석의 사촌오빠인 나중석의 송덕비도 자리하고 있다.
    나기정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 인명사전 편찬을 위해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2) 족보

     

    나혜석은 4월18일(호적상으로는 4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나주 나씨 나기정(羅基貞)과 수성 최씨의 최시의(崔是議)의 5남매 稽錫(계석), 弘錫(홍석), 景錫(경석), 蕙錫(혜석), 芝錫(지석) : 호적상으로는 계석을 제외한 4남매 중 넷째로, 딸로서는 둘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아기(兒只)였으며 학교에 들어가서는 명순(明順)이라 불렀고, 돌림자를 넣어 지은 혜석이란 이름은 일본 도쿄 유학갈 때 얻었다.


    3) 재적부

    재적부(호적등본)에 첩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나기정은 축첩을 하였으며, 첩으로 기록된 ‘白弘山’은 나혜석보다 불과 한 살이 많았다. 나혜석은 딸뻘 되는 첩 때문에 평생 눈물짓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자랐다. 축첩을 행하던 그 시대의 관행을 접하고 자란 나혜석은 나중에 소설 ‘경희’에 본인의 입장을 표현하게 된다.

    4) 형제 관계


     서출로 보이는 언니 계석(1888~1939)은 호적 등 관련 서류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다른 형제와 달리 신교육을 받지 않고 수원의 갑부 최기환과 일찍 혼인한다. 동생 지석은 혜석과 함께 진명여학교를 졸업했으나 언니보다 먼저 혼인한다. 큰 오빠 홍석은 도쿄 와세다 대학 정치과를 졸업(1909)하고, 수원금융조합 서기(1918), 수원면협의원(1920), 경성편리사 이사(1923)를 거쳐 조선 수원 청년구락부 회장 등 청년운동과 신흥종교 대화교의 간부로 활동한다. 나중에 작은아버지 나기형의 승계자가 되어 입양된 후 사실상 둘째인 경석이 맏이 역할을 했다.
    작은오빠 경석(1890~1959, 아명 두남(斗南), 호 공민(公民))은 고향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1910년 동경 정칙(正則) 영어 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동경 고등공업학교에서 화공학을 전공한 뒤 졸업했다. 1915년부터 3년간 오사카에서 재일동포 빈민 구호 등 사회운동을 했으며 귀국 후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만주 길림의 손정도 목사에게 전달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입국하다 발각되어 징역 3개월 처분을 받기도 한다. 이후 국산품 장려를 위한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를 지내고 만주 봉천에서 농지 개간 사업을 위한 민천공사(民天公社) 및 고무공장을 경영하기도 한다. 1941년 귀국 후에는 대종교 포교 활동과 빈민 구제 사업을 했다.

    나주 나씨의 납골당이 나기정 묘소 인근에 위치해 있는데, 사진상으로는 나기정 묘소의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나혜석의 큰아버지인 나기원은 가선대부 둥중추부사를 지내고, 정부인 철원 송씨 사이에 아들 중석(重錫) 1878년생, 자(字) 성규(聖奎), 호 매조(梅祖,) 이당(耳音堂)을 두게 되는데 가문의 종손이다. 나중석은 1901년 함경북도 관찰부주사, 1906년 정3품 통정대부가 된다. 그는 수원지역의 대지주면서 삼일학교의 설립자 가운데 하나가 되는 신교육가로 소작인에게 토지 분배 등의 자선사업가등으로 명망이 높다. 현재 그의 고향마을인 봉담면 분천리에 그를 기리는 송덕비가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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