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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혜석, 결혼과 이혼 그리고 사랑
    역사 2024. 1. 29.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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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 (1896~1948)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불리며, 여성 해방, 여성의 사회 참여 등을 주장하였다. 그녀의 삶은 그림과 글, 시와 운동, 그리고 사랑과 이혼으로 가득했다. 이 글에서는 그녀의 결혼 생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나혜석
    나혜석의 '자화상'  1928년 작 추정

    나혜석은 1920510, 변호사이자 외교관이었던 김우영과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식은 당시의 일간지에도 보도되는 세레모니였다. 김우영은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전도유망한 인사였다. 나혜석은 김우영의 6년간의 구애를 받아들여, 이미 결혼 전력이 있는 그와 서울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평범하지 않았다. 나혜석은 결혼하기 전에 김우영에게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결혼 후에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달라. 둘째, 결혼 후에도 친구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해달라. 셋째, 결혼 후에도 여행을 할 수 있게 해달라. 김우영은 이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 후에도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며, 사랑과 존경을 바탕으로 한 동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여행과 모험으로 가득했다. 결혼식 다음 날, 그들은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간 곳은 일반적인 신혼부부가 가는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혜석의 전 연인이자 천재로 일컬어졌던 최승구의 무덤을 찾아간 것이다. 최승구는 1916년 폐병으로 사망했는데, 나혜석은 그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우영은 나혜석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녀의 곁에서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다. 그들은 최승구의 무덤 앞에서 서로의 사랑을 다짐했다. 그 후, 그들은 만주와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영국, 미국 등을 여행하며,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접했다. 나혜석은 여행 중에도 그림과 글, 시를 쓰며, 자신의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김우영은 나혜석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녀의 작품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서로의 꿈을 응원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온전히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결혼 후 11년 반 동안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낳았는데, 그 중 둘째 아들 김진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나혜석은 아들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우울증에 빠졌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신의 재능에 회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멈추고, 글과 시를 쓰는 것에만 몰두했다. 그녀는 자신의 고민과 갈등을 글과 시에 담아, 여성의 삶과 사랑, 성과 정조, 결혼과 이혼 등에 대해 대담하게 표현했다. 그녀의 작품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맞지 않았고, 그녀는 비난과 공격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녀의 결혼 생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우영은 외교관으로서 세계 각지를 오가며 바쁜 삶을 살았다. 그는 나혜석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도,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나혜석을 사랑했지만,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거나 해결해주지 못했다. 그는 그녀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더 많은 자유와 독립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에게 더 많은 공허함과 외로움을 주었다. 나혜석은 자신의 남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찾았다. 1931, 자신의 남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외교관 최린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 최린은 나혜석의 작품을 존중하고, 그녀의 고통을 공감하고, 그녀의 갈증을 채워주었다. 그녀는 최린과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삶에 다시 빛을 찾았다. 나혜석은 최린과 함께 세계를 다시 여행하며, 예술적 재능을 발휘했다. 파리, 베를린, 상하이, 베이징 등에서 전시회를 열고, 그녀의 작품은 자신의 색깔과 스타일을 가진 독창적인 화가로서 인정과 호평을 받았다.

    그녀는 또한 시인, 작가,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으로도 활동했다. 여성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여성의 삶과 고통을 그녀의 작품에 담았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행복하지 않았다. 최린은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과 친구이자 동료였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비밀로 유지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만나기 위해 여러 번의 위험을 무릅썼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결국 파리 한인 사회에 알려지고, 나혜석은 이혼하게 되었다. 이혼은 당시에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나혜석은 사회의 비난과 차별을 받았다. 그녀는 그 후로도 최린과 연락을 하지 못했다.

     

    나혜석은 19481210, 행려병자로 숨을 거두었다.

     

    나혜석은 그녀의 삶을 예술에 바쳤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그녀의 작품에 표현했다. 그리고 작품을 통해 지금의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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